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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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영웅이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다.[15]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름을 떨친 호레이쇼 넬슨 같은 명장들은 모두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순신은 정부와 외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반대로 이순신이 정부와 명나라 육군에게 식량, 무기, 종이, 부채, 조총 등 각종 물자와 진상품을 지원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생계까지 직접 돌보면서 힘겹고 외롭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으며 심지어 권율 휘하의 육군이 허락도 없이 이순신이 어렵게 마련한 수군이 먹을 식량을 시도 때도 없이 약탈하고 수군 병력을 마음대로 빼내어 육군으로 편입시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급자족했으며, 휴전기 당시 수군 기지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군비를 꾸준히 확장하여 최강의 함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7년간 수군을 이끌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군함을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뤄냈다.[16]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17]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했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추격하여 퇴각로를 차단한 뒤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왜선 200척을 깨부수고 100척을 포획하며 일본군 수만 명을 처치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크나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임금에게 삼도수군통제가 된 이후 쿠데타 의심과 견제를 받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원균의 칠천량 해전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대한민국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18]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수도 한양,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 파병 등에 일조하며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과 자기 사람들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 및 대우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 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19]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20]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21]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평가는 정치적인 성향이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 이순신은 그런 부분에서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22]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23]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24]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25]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했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26]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27]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덕에 40여 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출처 킹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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